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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프도록 아름다운 -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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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학교 가는 버스에 오르는 찬승은 이제 혼자 다니는 것에 꽤 익숙해졌다. 그러나 우울하긴 하다.
‘후우….’
오늘은 금요일이다. 개강은 그제인 수요일에 했으니 오늘이 첫째 주의 마지막인 것이다. 그런데 학교에 가서 후배 한 명 친해지지 못했다. 아니 후배 한 명 알긴 했다. 홍아영….
‘으으!’
아직도 어제의 일을 떠올리면 괴로워 죽겠다. 04학번이면 2학년이다. 찬승도 2학년. 수요일, 목요일 수업엔 마주치지 않았지만 금, 월, 화 수업은 마주칠지 모르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일이 꼬였어….’
그래도 찬승은 모텔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흥분이 되어 자지가 커진다. 정말 뜨겁게 섹스를 나누었었다. 몸매도 예술이고 얼굴도 예쁘다. 게다가 그 여자가 후배였다는 상상을 하면 왠지 더욱 흥분이 되기도 한다.
‘친하게 지내면 또 다시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때 찬승의 흥분이 급속도로 확 하고 줄어들었다.
‘천사다….’
찬승의 뇌리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성스러운 천사를 본 것이다. 오늘도 역시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굉장히 섹시한 느낌의 아영과 비교하면 천사는 정말 성스럽고 범접치 못할 존재처럼 느껴진다. 찬승은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았다.
‘수요일 아침에도 보고 오늘 아침에도 보고…. 히히. 잘하면 자주 볼 수 있는 건가?’
찬승은 버스 손잡이를 잡고 멍하니 천사에게로 시선을 고정 시킨 채 학교까지 올라갔다. 그리고 버
스에서 내려 또 다시 예대 건물로 들어가는 천사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찬승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도 그렇고 오늘도 혼자 다니네…. 저렇게 예쁜데 왜 혼자 다니지.’
찬승은 혹시 그녀가 학교에서만은 남자친구가 없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가 생기자 기분이 좋아졌다. 용기를 내어 천사에게 말을 걸거나 고백 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자친구가 없을 거라는 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좋은 기분은 강의실에 들어서자 여지없이 무너졌다.
“억-!”
찬승은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작은 비명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몇몇 사람들이 찬승을 돌아보았는데, 그중 한 여자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홍아영….’
홍아영이 앉아있었다. 그때 미경이라 불린 친구와 같이…. 아영의 고개가 다시 홱 하고 앞으로 돌아간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아침부터 좋았던 기분을 망친 찬승 역시 아영과 먼 뒷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그녀를 피했다.
강의가 시작되었다. 영어 수업이다. 원어민 강사가 영어로 학생들에게 뭐라고 지시하기 시작했다. 영어 실력이 형편없는 찬승이 강사가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그저 갑자기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에 가만히 있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오더니 찬승에게 말했다.
“저기 저 뒤에 붙어있는 종이대로 앉으라는데요. 여긴 제 자리입니다.”
“아 예.”
찬승은 남자의 말에 벌떡 일어나 강의실 뒤로 갔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찾아보니 과 별로 앉혀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김찬승’ 옆에 당당하게 붙어있는 ‘홍아영’의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억-!”
찬승은 다시 한 번 작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러야 했다.
4명씩 앉는 책상에 앉고 나자 자신의 옆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앞을 노려보고 있는 아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옆으로 아영의 친구인 미경이 그 특유의 차가운 표정으로 조용히 앞을 보고 있었고, 그 옆에는 모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미경은 저번에 봤을 때와 달리 검은색 뿔테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검은색 뿔테 안경이 그녀의 도도하고 이지적인 매력을 한층 부각시켜주었다. 아마 수업시간에만 착용하는 안경 같았다.
찬승은 고개를 푹 숙였다. 1학기 동안 이렇게 수업을 들어야 하는 것이다.
‘금요일은 학교 오지 말아버릴까….’
괴로워하는 찬승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빠져나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가는 찬승의 눈에 한 자보가 들어왔다. 법학과에서 오늘 개강파티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도 이따가 끝나고 가볼까….’
아는 사람도 없다. 아니 혹시 02학번 동기가 있어 아는 체 해줄지도 모른다. 오라는 사람도 없었는데 가도 될까…. 고민하던 찬승은 결국 가보기로 했다. 자신도 법학과요 02학번인데 안 갈 이유가 뭐가 있냐는 것이다.
*
강의가 끝난 후 학교를 내려온 찬승은 자보에 써있던 술집 앞에서 어슬렁거렸다. 안에 꽤 많은 학생들이 보였다. 다른 손님은 없는 걸로 봐서 술집을 빌린 것 같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찬승은 이윽고 용기를 내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러자 꽤 많은 시선이 찬승에게로 쏠린다. 민망해진 찬승은 재빨리 그들을 둘러보았지만 아는 얼굴이 없었다. 그때 한 안경 쓴 남학생이 다가오며 찬승에게 말했다.
“법학과세요?”
“아 예. 02학번 김찬승입니다.”
“아. 그래요. 전 00학번 유영모입니다. 말 놔도 되죠?”
“그럼요….”
“그럼 일단 만원부터 주고…. 응. 됐다. 저기 앉아.”
유영모라 소개한 선배는 찬승에게 한 자리를 권해주었다. 그 테이블을 본 찬승은 놀랐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이는 남자들이 우글거리는 테이블…. 딱 봐도 복학생 테이블이었다.
‘하하하…. 내가 그렇지 뭐….’
찬승은 괜히 왔다 싶었다.
한참을 술을 마시는데 재미가 없다. 다 찬승보다 위 학번인 99, 00, 01학번 선배들이었다. 이 남자들이 모이면 무슨 이야기를 하겠는가? 군대얘기였다. 찬승은 그저 묵묵히 술만 마셨다. 주위를 둘러보니 꽤 예쁘장하게 생긴 여학생들이 모여 있는 테이블도 있다. 그 테이블에는 그 여학생들의 동기인 듯한 파릇파릇한 남학생들이 하하호호 웃으며 즐거운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었다. 찬승이 부러운 듯 그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자 한 남자선배가 말했다.
“야야야. 저런데 봐서 뭐하냐. 우린 우리 끼리 놀면 되 인마.”
“예….”
찬승은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찔끔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 선배가 말을 이었다.
“너 후배들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4월 2일에 연합엠티 가거든? 그때 따라가.”
“4월 2일요?”
찬승은 1학년 때 연합엠티를 따라간 기억이 난다. 전 학년은 물론이요 교수님과 졸업한 선배님들도 오는 큰 엠티였다. 찬승은 그때 많은 선배들과 어울려 논 기억이 있다. 물론 예쁘장한 여자 선배들과 놀았지만…. 그때는 정말 선배들과 후배들이 거리낌 없이 놀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인 것이다.
‘연합엠티! 그래 그게 있었지!’
찬승은 왠지 희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
“으…. 머리 아파.”
해가 하늘 꼭대기까지 솟은 토요일의 오후. 찬승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겨우 일어날 수 있었다. 어제 남자선배들과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기억도 잘 나질 않는다. 그저 주는 대로 조용히 받아먹다보니 꽤 취한 것이다. 결국엔 여자 후배들과는 얘기 한 번 나누질 못했다. 근처까지도 가보질 못했지….
찬승은 갈증을 느끼며 자신의 방을 나섰다. 그리고 냉장고로 가자 동생의 방이 열리며 자신과 같은 몰골의 여동생이 나타난다.
“으. 머리 아파!”
두통을 호소하는 서희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든 모양이다. 옷은 어제 그대로였고 머리는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졌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잠든 것은 엄청 취했단 이야기이다. 찬승은 그런 서희가 걱정 되 한마디 했다.
“너 술 적당히 마시고 다녀라 좀. 어떻게 매일 취해서 들어 오냐.”
“아-! 몰라몰라몰라. 머리 아파.”
서희는 찬승을 밀치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유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키기 시작했다.
“후아-!”
한참을 마시고 난 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숨을 토해낸다. 찬승은 그런 여동생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그렇게 예쁘고 모범적이었던 여동생이 숙취해소를 하며 좋아하다니…. 게다가 저 몰골은 평소의 예쁜 모습과는 거리가 있었다.
갈증을 해소한 서희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찬승에게 말했다.
“오빠!”
“뭐.”
“아무래도 날 좋아하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아.”
찬승이 무슨 얘기냐는 듯 서희를 바라보자 그녀의 말이 이어진다.
“동기며 남자 선배들이며 다 술자리에서 내 옆에 앉으려고 그러고 나랑 술 마시려고 그러고…. 내가 집에 간다면 서로 데려다주겠다고 그러고…. 후훗. 내가 인기가 많은가봐!”
찬승은 눈을 가늘게 뜨고 동생을 바라봤다. 예쁘다. 솔직히 말해서 예쁘고 몸매도 남자들이 너무 좋아하는 가슴이 큰 몸매였다. 그러니 걱정이다. 남자 한번 사귀어 보지 못한 동생이 이상한 남자들을 만날까봐…. 그래서 찬승은 넌지시 물었다.
“넌 그래서 맘에 드는 사람 있어?”
“으음…. 동기 남자애 중에 근사한 애가 한 명 있는데. 그 애 인기 되게 많거든. 근데 그 애도 나한테 좀 관심이 있는 것 같아. 히히.”
서희는 뭐가 좋은지 연신 실실거린다. 찬승은 그런 동생을 무시하며 조용히 잠이나 더 자러 들어갔다.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가려면 술 좀 더 깨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월요일. 3월의 둘째 주라 여전히 날씨는 쌀쌀하기만 하다. 찬승도 이제 슬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개강 첫날은 학교에 간다는 설렘으로 마치 봄 날씨 같이 따뜻하다고 느꼈는데 이젠 그런 느낌을 받을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외롭다…. 오늘은 천사 없나.’
학교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는 곳으로 가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천사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찬승은 실망했다. 학교 같이 가는 사람도 없고 학교에 친구도 없다. 그나마 천사를 보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는데, 천사마저 없다. 학교 가는 것이 슬슬 재미가 없어지기 시작한다.
‘제길…. 그래도 연합엠티 때까지는 참아봐야지….’
찬승은 연합엠티에 갈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며 학교에 올라가는 버스의 맨 뒷줄에 섰다. 오늘 역시 줄은 끝도 없이 길다. 그때 여자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저기요.”
찬승은 자신을 부르는 것 같은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어떤 여자가 자신을 쳐다보며 서 있었다.
‘헉…. 예쁘잖아!’
연갈색의 긴 머리를 단정하게 틀어 올려 깔끔하게 묶은 머리. 갸름하고 작은, 새하얀 얼굴에 자신을 바라보는 맑고 검은 눈동자…. 찬승이 당황해서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여자가 말을 잇는다.
“여기가 K대학교 가는 버스 타는 줄인가요?”
찬승이 다니는 학교다.
“예? 예….”
찬승은 당황해서 얼떨결에 대답을 한다. 그러자 그 여자는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찬승의 뒤에 섰다.
찬승은 무지 예쁜 여자가 자신의 뒤에 서있자 조금 떨리기 시작했다.
‘뭐하는 여자지. 우리 학교 학생은 아니겠고…. 음 편입하러 왔나.’
이런 저런 생각으로 시간이 지나자 차츰 줄이 짧아졌고 찬승과 여자가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남은 자리는 두 명이 같이 앉을 수 있는 자리 뿐. 찬승이 앉자 자연스럽게 여자가 옆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자 찬승은 왠지 모를 어색함을 느꼈다. 처음 보는 여자여서 어색한 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아까 서로 잠깐 대화를 나눴는데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결국 찬승은 용기를 내어 먼저 말을 붙여보기로 했다.
“편입원서 넣으시러 가세요?”
찬승의 물음에 여자가 고개를 돌려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누구 찾을 사람이 있어서요.”
“예….”
그리고 다시 어색한 침묵. 이번엔 여자가 입을 열었다.
“혹시 경제과세요?”
“아뇨 법학관데요.”
“예….”
이번엔 다시 여자의 대답을 끝으로 어색한 침묵. 찬승이 다시 용기를 내어 질문한다.
“경제과에 누구 찾을 사람 있으신가 봐요?”
그러자 여자의 표정이 무언가 부드러워진다. 뭐라 표현하긴 힘들었지만 확실히 무언가를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변한 것이다.
“예…. 전에 알고 지내던 남자애가 여기 경제과 다닌다고 했거든요. 그 애가 살던 옛날 집에 물어보니까 군대 갔다고 했기에 올해쯤에 복학할 것 같아서 찾아가보는 거예요. 핸드폰 번호도 바뀌어서요….”
말하는 여자의 표정이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분명 무언가 아름다운 추억을 회상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찬승은 분명히 이 여자가 그 남자를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그 정도로 찾으시는 거면 무척 좋아하셨나 봐요?”
그러자 여자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예…. 많이 좋아했어요. 물론 저 혼자 좋아한거지만….”
여자의 말에 찬승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렇게 예쁜 여자가 짝사랑이라니…. 남자가 상당히 대단한 놈인가….’
찬승은 왠지 여자가 불쌍하게 느껴져 용기를 주고 싶었다.
“그럼 오늘 꼭 찾으실 수 있겠네요.”
찬승의 말에 여자가 크게 미소 지었다.
“예.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잠시 후 학교에 도착하자 여자는 찬승에게 길을 물은 후 인사를 한 뒤 경제과 과실이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찬승은 그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예쁘던데…. 어떤 놈인지 부럽군. 특히 반짝이는 입술이 진짜 예뻤다. 립글로스를 발랐나….’
아까 본 여자의 모습을 떠올려보는 찬승이었다.
*
찬승의 입장에서 금요일 수업은 무척이나 피하고 싶은 수업이었다. 하지만 필수로 이수해야 하는 과목이기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우선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홍아영. 말할 것도 없다. 자신을 보면 인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하지 않았고 얼굴을 찡그리는 것은 옵션이었다. 한 달 전쯤 모텔에서 있었던 뜨거운 섹스의 기억이 사라질 정도로 냉랭한 태도였다.
그리고 그 옆의 친구 미경. 책에 써있는 이름을 보니 아영과 같은 04학번인 유미경이었다. 그러나 찬승을 선배로 보지 않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예 본 체를 하지 않는다. 아니 눈도 한 번 마주쳐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검은색 뿔테 안경만을 만지작거리며 수업에만 집중한다.
찬승이 이런 분위기의 수업을 하고 싶겠는가….
그래도 참고 다녔다. 1주일을 버텼고 1주일을 더 버텼다. 학교에서 꾸준히 혼자 다니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수업 듣고 혼자 집에 가도 열심히 버티며 다녔다. 왜냐하면 내일이 연합엠티를 가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미 과 학생회장이라는 00학번 선배에게 얘기도 했고 엠티비용도 냈다. 게다가 토요일 아르바이트도 하루 뺐다.
‘드디어 내일이다!’
4월의 상쾌한 시작을 알리는 1일이자 금요일이다. 그리고 내일은 연합엠티를 가는 날이다. 눈부신 햇살 속에서 점차 따뜻해져가는 날씨가 찬승에게는 신이 내려주시는 가호처럼 보였다.
그 끔찍한 영어 수업을 들어가는 것도 기분이 좋다. 강의실에 들어오는 자신을 못마땅한 듯 힐긋 쳐다보는 아영의 표정도 너무나도 반갑다. 찬승은 자리에 앉으며 너무나도 들뜬 마음에 아영에게 슬쩍 물었다. 만면에 가득 웃음을 짓고….
“아영아. 내일 연합엠티 가니?”
아영은 찬승의 웃음 짓는 얼굴에 깜짝 놀라 고개를 슬쩍 뒤로 뺀다. 그리고 찬승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얼굴을 찡그리며 대답했다.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듯이….
“아뇨.”
아영의 대답과 표정은 왜 짜증나게 나한테 말을 거느냐는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왔다. 그러나 찬승은 신경 쓰질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런 찬승의 반응에 아영의 얼굴만 더욱 일그러질 뿐이었다.
*
“오빠 내일 어디가?”
늦은 저녁에 방 안에서 이 옷 저 옷을 보고 있는 찬승이 이상했는지 서희가 물었다. 찬승은 대답은커녕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리어 물었다.
“오늘은 어쩐 일로 일찍 들어왔냐?”
“칫. 누가 매일 술만 마시나….”
“너 매일 술만 마시잖아.”
찬승의 말에 서희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사실이니까…. 잠시 삐죽거리던 서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나 내일 엠티 가니까 일찍 들어왔지”
서희의 말에 찬승이 놀라 뒤돌아봤다.
“뭐 엠티? 무슨 엠티? 어디로?”
“연합엠티라고 그랬나…. 가평으로 간데.”
찬승은 강촌이었다. 장소는 다르다. 그러나 찬승은 그걸 걱정하던 것이 아니었다. 엠티라니…. 서희는 오티를 가지 않았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어울려 밖에서 자고 오는 것은 내일이 처음인 것이다. 찬승은 걱정이 되었다. 술에 취한 서희를 노리는 수많은 남자들의 늑대 같은 눈빛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런 제길…. 여대생이 엠티 가는 건 당연한 건데 오빠 입장이고 보니까 무지하게 걱정 되네….’
얼굴을 찡그리는 찬승이 이상했는지 서희가 물었다.
“왜 그래?”
“아…. 아냐. 나도 내일 엠티간다. 우린 강촌으로…. 그나저나 너 내일 술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취하지 말고. 알았어?”
“칫. 내 맘이다.”
서희는 혀를 삐죽 내밀고는 찬승의 방에서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그런 동생의 뒷모습을 보며 찬승이 중얼거렸다.
“어휴…. 난 딸은 못 낳겠다.”
*
다음 날 찬승이 학교에 도착하자 꽤 많은 버스가 서 있었다. 찬승의 과 말고도 다른 과도 많이 가는 것 같았다.
찬승은 법학과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갔다. 그러자 1학년들과 몇 몇 선배들이 모여서 엠티 준비를 하는 것이 보였다. 버스에 술도 싣고 각종 여러 엠티에 필요한 준비물을 싣고 있었다.
찬승은 그러한 장면들을 보자 마구 흥분이 되기 시작했다. 역시 대학생활의 로망은 엠티이고 엠티의 로망은 술이다.
‘아아…. 빨리 가서 사람들과 술 마시고 싶다. 솔직히 말하면 예쁜 여자 후배들이랑….’
찬승은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는 꼭 기필코 어여쁜 여자 후배들과 친해지고 말리라….
잠시 후 준비가 끝나고 버스 두 대에 사람들이 나눠 타서 출발하기 시작했다. 연합엠티 장소로….
4월의 날씨는 너무나도 맑다. 서울을 빠져나가며 달리는 버스 창으로 따뜻한 봄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찬승도 그런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밖을 눈부시게 바라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찬승아. 너도 빨리 얘기해봐라.”
허탈한 미소를….
찬승은 기가 찼다. 자리를 앉아도 이렇게 앉다니…. 주위 한 칸 이내는 모두 남자 복학생 선배들…. 그것도 저번 개강파티 술자리에서 만났던 선배들이다. 그리고 그 선배들이 찬승에게 빨리 얘기하라며 재촉하는 것은 당연히 군대얘기.
찬승은 할 얘기가 없다고 극구 사양했지만 선배들은 집요했다. 결국 찬승은 GOP에서 근무했던 일을 있는 뻥 없는 뻥 섞어가며 얘기하고는 돌아 앉아 잠을 청했다.
‘제발 눈 뜨면 강촌이기를….’
찬승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이 원하던 연합엠티는 이런 것이 아니었기에….
“야야 다 왔다.”
찬승은 굵직한 남자 선배의 목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그리고 황급히 창문 밖을 살펴보자 강촌에 위치해 있는 숙소에 도착해 있었다.
‘오예!’
찬승은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버스에서 뛰어내려왔다. 그리고 맑고 푸르른 4월의 하늘을 향해 두 팔을 힘껏 벌리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후아압!”
너무나도 맑고 청량한 봄의 기운이다.
*
“자자 그럼 모두들 학생회에서 나눠주는 쪽지를 받으십쇼. 쪽지에는 우리 과 학생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웬만하면 남자한테는 여자 이름을, 여자한테는 남자 이름을 적었지만 운이 없으면 동성끼리 걸립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름이 나온 사람이 마니또입니다. 마니또 아시죠? 내일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밝히지 말고 그 사람한테 잘해주시면 됩니다.”
강촌에 도착해 점심을 먹은 찬승은 학생회장의 말을 듣다가 아직도 이런 유치한 걸 하냐며 혀를 차다 생각을 바꿔 재빨리 쪽지를 받았다.
‘여자 후배가 걸릴지도 모르잖아!’
찬승은 기대감에 부풀어 쪽지를 펼쳤다.
[04 정지현]
‘정지현!’
여자다. 100% 여자 이름이다. 남자 이름일 수도 있지만 찬승의 본능은 이 쪽지에 적힌 이름이 여자라고 가르쳐 주고 있었다.
‘누구지!’
찬승은 재빨리 조심스러운 눈치로 주위를 살폈다. 걸리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한 여학생의 명찰에 눈이 닿았다.
[04 정지현]
‘빙고!’
키는 꽤 크다. 169cm 정도? 등까지 내려오는 긴 검은 생머리에 새하얗고 갸름한 얼굴. 헐렁한 후드티를 입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청바지를 입은 다리로 보니 전체적으로 마른 편의 몸매였다. 무척이나 예쁘고 청순한 느낌의 후배였다. 게다가 가끔씩 웃을 때 보이는 환한 미소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 때 찬승의 귀를 의심케 하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야. 전지현. 넌 누구 걸렸냐?”
지현의 옆에 서 있던 남학생이 묻는 말이었다. 그러자 지현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밀이지롱.”
목소리도 맑고 고운 것이 너무나도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저, 전지현? 정지현이 아닌가?’
그리고 주위 사람들이 계속해서 정지현에게 전지현, 전지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찬승은 처음에는 명찰의 이름이 잘못 쓰였나 싶었다. 하지만 조금 더 살펴보다보니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연예인 전지현이랑 이미지가 굉장히 비슷한 것이다. 큰 키에 긴 생머리, 전체적으로 마른 몸매에 예쁘고 청순한 얼굴. 게다가 이름 또한 정지현이니 더할 나위 없지 않은가?
‘쳇. 뭐야. 어쨌든 쟤구나. 짱 예쁘네…. 이 기회에 꼭 친해져야지 후후.’
찬승은 정지현이라 불린 여자 후배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
그러나 찬승에게 있어 지현의 청순한 이미지는 금세 무너져 버렸다. 연합엠티 게임이랍시고 조별로 나누어서 미니 축구 게임을 하는데 지현의 활약이 장난 아니었기 때문이다. 골대 앞에서 남자들이 준 공을 크게 기합을 넣으면서 차는데 그 세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찬승이 넋 놓고 구경하는 와중에 또 다시 지현에게로 공이 갔다. 지현은 또 다시 크게 기합소리를 지르며 공을 찼다.
“얏!”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늘씬한 다리가 높이 올라가며 길고 검은 생머리가 크게 찰랑인다.
분명히 여자의 목소리다. 굵고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맑고 높은 아름다운 목소리…. 어떻게 저런 아름다운 기합소리를 지르며 저렇게 공을 세게 찰 수 있을까….
지현이 찬 공이 또 골대에 들어갔다.
“아자!”
지현이 맑게 웃으며 어린아이처럼 좋아한다. 그녀의 맑은 웃음이 밝은 햇살에 비춰지며 눈부시게 빛난다.
‘예쁘다….’
찬승은 너무나도 활발한 지현의 모습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지현의 공차는 모습을 보면 여전히 깜짝 깜짝 놀란다.
또 다시 찬승이 넋을 놓고 구경하던 도중에, 지현이 자신에게 온 공을 강하게 헛발질 한다. 그리고 작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모습을 본 찬승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마니또다 내 마니또. 지금 나가서 내가 도와주면 친해질 수 있어!’
찬승이 막 나가려 할 때 많은 숫자의 남학생들이 지현에게 몰려들었다. 찬승은 그들의 기세에 눌려 주춤거리며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마니또인 자신이 도와주지 않아도 달려갈 남자가 많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던 것이다.
‘내가 낄 수는 없겠군….’
찬승은 길게 한숨을 쉬며 주머니에 있던 마니또 쪽지를 구겼다.
*
결국 찬승은 별 한 것도 없이 저녁 술자리 시간을 맞게 되었다. 후배들이랑 친해질 기회도 없었고, 같은 조 안에 여자 후배들이 있긴 했지만 그녀들은 찬승에겐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되었지….’
찬승은 인기가 많았던 1학년 때를 떠올렸다. 법학과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과에서도 꽤 인기가 좋았을 정도로 괜찮게 생긴 편이었고 성격도 좋았다. 근데 지금은 복학생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이렇게 무너져 버린 것이다.
‘안 돼. 여기서 포기할 순 없어. 3년을 다녀야 하는 학교인데!’
술자리의 시작은 조별로 나누어 앉아서 시작 되었다. 찬승은 우선 같은 조에 있는 여자 후배들과 친해져 보기로 했다. 자신의 옆에 앉아서 친구와 떠들며 놀고 있는 통통한 여자 후배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 반갑다. 넌 이름이 뭐니?”
“최세미요….”
잘 놀고 있던 여학생이 극도의 경계의 눈빛을 보낸다…. 찬승은 처음부터 글렀다고 생각하며 알았다고 하고는 다른 여자애에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그러나 다들 똑같은 반응…. 찬승이 복학생이고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후우….”
결국 찬승이 같은 조의 여자애들과 친해지는 걸 포기하고 일어서서 다른 조로 가려 할 때 남자선배가 그를 불렀다. 찬승은 그 선배의 옆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찬승아. 다 봤다. 뭘 그리 여자후배들과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이냐. 복학생은 복학생끼리 놀면 되는 거지.”
‘크윽….’
찬승은 별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선배와 두 세잔의 술을 마셨다. 그러다가 선배가 다른 사람과 이야기 하는 틈을 타 일어서서 다른 조로 가려고 했다. 그때 다른 남자 선배가 찬승을 붙잡았다.
“야. 어디 가냐. 술 한 잔 해야지.”
“예에….”
결국 그렇게 이리저리 남자 선배들에게 붙잡혀 다니길 몇 차례…. 찬승은 화장실을 가겠다는 핑계로 밖에 나왔다. 밖에 나오니 이미 두런두런 모여서 이야기 하고 있는 후배들이 보였다. 남자와 여자가 섞여서….
‘크읏…. 부럽다.’
찬승은 저기 끼고 싶어 죽겠다는 생각에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껴봤자 분위기만 망친다는 것을 알기에 조금 멀리 나가보기로 했다.
숙소에서 조금 멀어지자 조용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4월의 맑고 시원한 밤하늘에 아름다운 별들이 보이는 곳이었다. 찬승은 길가에 있는 돌에 걸터앉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예쁜데….’
강촌의 밤하늘은 정말 예뻤다. 서울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수많은 별들…. 찬승은 자신의 처지도 잊은 채 잠시 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자신에게 누가 다가오는 지도 알아채지를 못했다.
“뭐하세요?”
찬승은 자신의 곁에서 들려온 갑작스런 여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돌려 보니 긴 생머리를 깔끔하게 묶은 여자가 자신을 보며 서 있었다.
‘저, 전지현…. 아, 아니. 정지현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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