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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X - 2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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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국심사대를 지나고 세관을 통과하여 공항대합실로 들어서니 황회장을 맞이하기 위해 마중나온 그룹 직원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그토록 다정하게 살 붙이던 숙이지만 막상 한국땅을 밟으면서는 나보다 앞서서 그룹 사장단 일행에 파뭍혀 공항을 빠져 나가고 있다. 직원들이 타고 온 차는 물론 황회장 전용 기사까지 마중나와 대기하는데 비해 나는 초라한 짐 보따리 한 개만 달랑 끌고 있었을 뿐이지만 쓸쓸한 마음에 휩싸이며 리무진을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박사님, 어서 타시죠.” 황회장 기사가 외쳤다.



“뭐해요? 안가요?” 숙도 창문을 열고 어서 타라고 외친다.



“나도?” 약간은 머쑥한 기분에 빠져있던 내가 되물었다.



“그럼요. 집에 가야죠.” 숙이 창 틈으로 머리를 바짝 내밀고 말했다.



“아냐, 난 리무진버스를 타면 되니까 먼저 가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이 잡히지 않은 나로서는 선뜻 숙의 차에 동승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요? 그럼 먼저 갈께요.” 창문이 닫히며 서서히 황회장의 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뒤이어 사장단들의 차도 움직이며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다. 나는 물끄러미 그러나 조금은 외로운 마음으로 그들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망연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젠 내 집이 어딘지 모르겠다. 숙이 일행에 파뭍혀 공항을 빠져나간 순간, 적어도 나를 억세게 잡아 끌며 그 차에 태우지 않고도 이 곳을 빠져나간 순간, 나의 집은 도봉동이어야 했다. 오랜시간 이 땅을 비웠던 내 위치가 도봉동이어야 한다는 것을 숙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붙잡아 두지 않고 홀연히 떠날 수 있었을 것이다. 시내 중심가까지만 리무진으로 이동하면 지하에 수맥처럼 뻗쳐있는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미국갔던 일은 잘 됐어?” 아내가 반갑게 맞으며 물었다.



“응, 예상보다 반응이 더 좋더라.” 피곤했지만 많은 시간을 비웠던 나로서는 대답을 피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신 없는 동안 얼마나 쓸쓸했는지 알아?”



“아이들은 감기 안걸리고 잘 지냈니?”



“응, 씩씩하게 잘 있었지. 아직 학원가서 안돌아왔어.”



“그래, 피곤하니까, 커피 한잔 타줄래?”



짐을 끌어 거실 구석에 세워놓자 아내는 가방을 풀러 입던 옷가지를 세탁기에 넣고 주방에 가서 물을 올려 놓는다. 나는 쇼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다. 연속극들이 재방송되고 있었다.



“당신, 멀리 갔다고 해방감에 바람 핀건 아니지?”



“그럴시간이 어딨어? 연구하러갔었는데.”



“다 끝난거야?”



“아냐, 그쪽에서 연구소를 제공할테니 몇 년 와달라고 그러네.”



“우와, 그럼 몇 년씩이나 또 떨어져 살아야해?”



“지금이랑 다를 것도 없잖아. 어차피 얼굴 보기도 힘들었으니까.”



“그래도 그건 아니지. 여태까지야 내가 당신 연구실에 찾아가지 않아서 그렇지 맘만 먹으면 언제라도 볼 수 있었잖아. 그런데 미국으로 가면 정말 보고 싶을 땐 눈물만 나겠다.”



“그렇네. 어쩌지?”



“몰라. 행복이란게 뭐지? 돈 버는거? 아니면 식구들이랑 오순도순 사는거?”



“난 남자라서 일이 행복이라고 생각하는데...”



“무책임한 말인거 알지? 내가 남달리 당신을 이해하니까 지금까지는 참아줬지만 앞으로도 계속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면 참지 않을 수도 있다구.”



“정말 행복이란 뭘까? 난 결혼과 아이, 일과 모든 것들이 사람이 겪는 당연한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나봐. 그러니까 당신이 아이들과 씨름하며 사는 것도 과정이고 내가 식구들과 떨어져 살면서도 일에 파뭍히는 것도 과정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이 두가지가 모두 동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하나의 결과로 나타나서 가족도 있고 가정도 있고 일도 있는 것 아닐까 생각했거든.”



“그건 당신이 오만한 생각을 해서 그런거야. 내 잘못도 크긴 하지만.”



“어떻하는게 오만하지 않은거지?”



“당신이 일하는 목적이 뭐야? 돈 버는거? 성취욕?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명예?”



“글쎄다. 굳이 밝히라면 인류발전?”



“웃기는 소리 하지마, 어떤 누구도 인류 발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없어. 그냥 살다보니까 남들이 지나간 일에 대해 그랬다 싶어 명예를 붙혀준 것 뿐이야. 당신의 능력이 남들과 다른 것은 인정하지만 적어도 당신이 나랑 결혼하고 애까지 낳았다면 가정을 지키기 위한 노력도 일 만큼은 배려해야하는거야.”



“두 가지 모두 만족하게 할 수는 없겠지. 그럼 일을 그만둘까?”



“그럴 수 있어? 나는 당신이 인류를 위해 일한다는 말을 믿지 않아. 차라리 나를 위해 헌신하기를 바랄 뿐이야.”



“잘하고 있지 않았나? 돈도 많이 갖다 줬잖아.”



“그래, 돈도 필요했지. 지금은 예전 보다 더 잘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맨날 집 밖에서만 맴도는 당신의 가치는 뭐야? 적어도 이 집에서 가장 노릇을 확실히 해야 하는 것 아냐?”



“웬만한 일은 돈으로 해결할 수 있잖아. 애들도 돈이 없으면 학원도 못보낼테고 먹거리도 떨어질테고.”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어?”



“그냥 하는 말이겠지.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돈 없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배불러서 하는 얘긴줄은 모르지만, 난 돈도 이젠 많아. 그래서 욕심이 생기더라. 외국 출장도 가지않았으면 좋겠고, 맨날 내 곁에만 있는 당신이 더 좋다는 생각이거든.”



“알았어. 당신은 내가 몇일 동안 혼자 여행을 다녀온 것에 대해 엄청 삐졌군.”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어. 하지만 몇 년동안 또 미국에 가야한다니 화가 나잖아.”



“미안, 배고픈데 뭐라도 먹을걸 주면 안돼?”







아내는 반가운 마음을 삐진 마음으로 모두 덮어 버렸다. 사랑과 미움은 같은 것이다. 먼 곳을 다녀온 나를 맞이하는 마음보다 없는동안 보고싶었던 마음으로 자신이 진정 하고 싶었던 말들을 덮어 버렸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얼른 분위기를 반전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아내는 더 이상 앙앙거리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서며 요깃거리를 만들기에 분주하다. 나는 오랫동안 비워뒀던 안방을 열며 방안의 따뜻한 온기가 문을 통해 온 몸에 부딪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평안함. 바로 이런 느낌을 위해 남자는 집을 찾는지도 모른다. 차가운 겨울을 이기려는 듯 화사하고 따뜻한 색깔로 침대보를 꾸며 놓았다. 딱딱한 침대는 포근함을 맘껏 느낄 수 있도록 폭신한 솜이불이 깔려있다. 아늑함에 피곤함이 녹아 내릴 것 같아 외출복을 벗고 아내가 음식을 만드는 동안 침대 속으로 몸을 뭍었다.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아이들이 학원에서 돌아오기 전인 초저녁에 잠깐 눈을 붙힌다며 침대속으로 파고 들었던 기억과 간단하게 뭔가를 먹으려고 준비해 달라던 주문이 아직 귓가에 생생한데 벌써 하루가 지나고 다음 날 아침이라는 얘기가 믿겨지지 않았다. 아이들도 엄마를 따라 안방에 들어와서는 곤히 잠자리에 들었던 내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어, 그래? 너희들도 잘 있었니?”



“네, 아빠.” 두 아이들이 병아리처럼 입을 모아 대답했다.



나는 얼른 이불을 제키고 아이들을 끌어 안고 차례로 머리를 쓰다 듬어본다.



“너희들 아빠 없을 때 엄마말 잘 들었지?”



“네. 아빠.”



“요즘 뭘 공부하니?”



“쥬니어 영어요.”



“오라, 너희들이 벌써 영어 공부를 한다고?”



“말도 말아요. 요즘 어린이 영어교실이 붐이잖아요. 돈도 많이 들지만 안하는 집이 없으니 어거지로 시킬 수 밖에.”



“우리 애들은 똑똑하니까 어릴 땐 그냥 놀게 하면 될텐데.”



“안 똑똑한 애들이 어딨어? 남들이 할때 안하면 뒤처지는거지.”



“그래도 어릴 땐 건강이 최곤데.”



“몰라서 하는 말인가 본데 요즘 애들은 태권도학원, 미술학원, 피아노학원, 영어학원 다니는 것이 기본이야.”



“그게 애들이야? 어른도 그 많은 과정을 소화하려면 비지땀이 줄줄 흐르겠네.”



“암튼 우리애들도 남들한테 뒤지지 않으려면 어쩔 수 없어.”



“그랬니? 너희들 힘들지?”



“아뇨, 아빠. 재밌어요.”



기특했다. 어른도 힘들어 할 판에 어린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서 놀지도 못하고 남들이 한다고 따라해야 하는 곤혹을 즐겁게 받아들여야만 하는가? 적어도 아이들은 어른들의 미래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오히려 공부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뛰어놀고 건강하게 자라는 것이 국가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고 믿고 있다. 각각의 년령별로 해야 할 일들이 있을 것이다. 교육정책자는 대학입학이라는 단일한 목표만 세워놓고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는 아이들에게 공부라는 것을 주입시킬 것이 아니다. 적어도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생각을 한정시킨다 하더라도 학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해 볼 필요가 있다. 전인교육과 특성교육이 필요한 때다. 전방위로 모든 것을 지식화 시킨 인간 보다는 인간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교육시킬 필요가 있다. 가정과 가족과 이웃과 사회를 생각하고 나아가 국가와 인류와의 관계를 정립시키기 위한 인성교육이 먼저 선행되야 한다. 전공과 학점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만점을 맞는 학생이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장학생과 장학금 지급 방법도 개선되야 한다. 인간의 능력이 아무리 무한하다고 치더라도 적어도 학사타이틀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전체 과목을 우수한 성적으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그 젊은이가 헤쳐나가야 할 미래사회를 위한 적성과목을 선정하여 과목 단위로 장학제도를 전환시켜야 한다. 모든 것을 잘 한다는 것은 모든 것을 못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적어도 학사라는 것은 전공과목을 정해놓고 자신이 혼신을 다해 그 과정을 이수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다른 과목에 대한 점수를 높일 수 없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성적표가 낮게 나올테고 장학금은 멀리 날아갈 것이다. 이러한 우려 때문에 능력있는 젊은이들은 장학금과 편안한 취업을 위해 자신의 능력을 모두 매장시킨채 성적이라는 목표를 위해 매진할 뿐이고 이런 시스템하에서는 우수한 인재를 양성할 수 없다. 아이들은 나름대로의 개성과 특질을 타고 난다.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아이들의 재능을 발굴하기 위해 다방면에 걸쳐서 기회를 제공하고 그렇게해서 발굴된 재능을 더욱 세련되게 키우기 위한 투자를 해야한다. 적어도 다른 아이들이 하기 때문에 우리 아이도 해야 한다는 막연한 환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되야 하고, 교육시스템은 우수한 인재를 다량으로 양성하고 있다는 막연한 환상보다는 분명한 재능을 보이는 인재들을 양성하고 다른 보편적인 사람들마져 그 대열에 뛰어들어 무한한 다른 재능을 발굴시킬 기회를 사장시키는 시스템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적어도 대학이라는 목표가 아이들의 인생에 있어서 걸림돌이 돼서는 안된다. 차라리 모든 국민은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까지 의무교육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 누구도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경쟁을 해서는 안된다. 국가정책이 모든 국민의 업그레이드라면 그렇게 들어가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 지원만 하면 모두 들어갈 수 있도록 인원을 제한할 필요도 없다. 다만 그들이 졸업이라는 문을 통과할 수 없도록 엄격한 잣대로 훈련시켜야 한다. 처음부터 졸업이라는 관문을 통과할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현장 기술을 익히게 해야 한다. 모두가 선생이고 모두가 박사인 사회를 원하기 보다는 자신의 재능을 명확히 하고 그 재능으로부터 사회를 이끌어 갈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곳이 대학이어야 한다. 나 혼자 만의 생각으로 사회를 바꿀 수는 없지만 우리 아이들마져 시류에 쓸려 다니며 맥없이 재능과 무관한 학습에 동참해야 하는 현실이 싫다.







“아이들이 과정을 싫어하지 않으니 다행이군.”



“애들이 얼마나 신나서 다니는데.”



“유심히 관찰해봐. 맥없이 돈 뿌리는 일이 없도록 각자의 재능을 찾아서 아낌없이 투자하자고.”



“알았어요. 어서 양치하고 식사해요. 오늘도 출근하는거죠?”



“그래야겠지. 회사일도 많이 밀렸겠는걸.”



“아휴, 몇일씩 고생하며 먼길 다녀왔을 땐 하루쯤 쉬게 하면 안되나?”



“맘이 안편하잖아. 내 일을 하는건데...”







집을 나서며 지하철을 탔다. 한시간 가까이 혼잡함 속에 몸을 맡기면 사무실에 도착한다. 일주일 정도 자리를 비운 사이에 비서역할을 위해 채용한 김미숙이라는 학생이 무슨 일을 해 놨을까 하는 작은 궁금증이 생겼다. 숙이 말하기를 미숙이라는 학생이 동거중이라고 했는데 어린 나이에 어떤 생각으로 동거를 하고 있는지 신기하다 싶은 호기심도 생겼다. 짧은 기간 긴 여행을 다녀온 사장단들도 아침 회의에 참석했을까? 그들은 나와 숙의 관계를 명확히 알게 되었으니 나에 대한 예우도 조금은 개선될텐가? 중앙부처의 한 가운데 있는 박동진은 내가 밖에서 겪은 일들을 소상히 알고 있을까? 탁과장은 새로운 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 몇 번이고 덜컹하며 문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사무실이 있는 역명이 눈에 들어왔다. 많은 사람들이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다 덜컹 문이 열리자 폭포수와 같이 우루르 밖으로 쏟아져 나갔다. 나도 그들의 틈에 끼어 사무실 정문을 들어서고 있다. 낯설지 않은 건물과 현관이지만 오늘부터 새롭게 비쳐질 나의 위상이 직원들에게 어떻게 반영되었을까 싶은 호기심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박사님, 어서 오십시오.” 정문을 들어서자 수위장이 거수경례를 부쳤다.



“엘리베이터 앞에 우르르 몰려 있던 직원들도 돌아보며 목례를 한다.”



“박사님, 출장은 잘 다녀오셨습니까?”



나도 목례로 그들의 궁금증에 답변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스르르 올라가는 기계 공간 속에서 직원들은 존경과 부러움으로 작은 속삭임 조차 허용하지 않는 긴 시간이 흘렀다.







“어서와요.” 황회장 방문을 들어서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사장단과 임원들이 회장실에 딸린 회의실에 미리 앉아 내가 들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쿠, 먼저들 와 계셨군요?”



“이박사, 미국에서 대단한 성과가 있었다고 들었어요. 업무 보고를 해 주시죠.”



“하하, 회장님이랑 함께 겪은 일인데 제가 따로 보고할 일이 있나요?”



“무슨 말씀. 어제 회장님께서 이박사가 오늘 아침 업무보고 할테니 서둘러 회의에 참석하라고 지시하셨소. 우린 궁금해서 죽을 지경인데...”







내가 자리에 앉자 황회장이 먼저 회의장 분위기를 잡으며 말하기 시작했다.



“알만한 분들이니까 까 놓고 얘기하죠.



우선 미국에서 이박사님과 내가 결혼식을 올렸어요.



그러니까 다른 직원들은 몰라도 여기 계신 분들은 이박사님이 내 낭군이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인정하셔야 된다는 얘깁니다.”



장내가 잠시 술렁거렸다. 미국쪽으로 건너와서 펜타곤 식구들과 정부 고위직이 함께 목도한 우리의 결혼식에 참석한 사장단들은 당연히 받아들였지만 국내에 남아 회사일만 보던 임원들은 그것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라는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려는 눈치였다. 여장부 답게 부끄러움을 물리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입장을 밝힌 숙에 비해 나는 너무 초라한 생각을 갖고 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내 입장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 도리겠지만 어딘가 있을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이 박사님을 존경하세요. 그분 자체가 이미 존경받을 위엄을 갖고 계시지만 내 낭군임을 생각하여 지금 보다 더 존경해 주셔야 합니다.”



쥐구멍을 찾을 수 없다. 어디 바퀴벌레가 드나드는 공간이라도 있으면 그 곳으로 머리를 쳐 박고 싶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힌 이상 나도 한마디쯤은 거들어야 되겠다 싶어 어렵게 말문을 열어 본다.



“나는 황회장을 보호할 의무가 있습니다. 존경은 명령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황회장의 일은 전적으로 나의 일이므로 두 사람의 결합에 대한 진부한 토의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회사를 그만둘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정리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어차피 두분은 법과 무관하게 각자가 성공이라는 열쇠를 쥐고 있습니다. 결혼에 관한 일은 기정사실이니 거론하지 말고 미국내에서의 성과를 얘기해주십시오.”



“네, 미국에서 저희 프로젝트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캐나다와 중국이 함께 참여하고 더 많은 국가가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확대하게 됩니다.



그들이 연구소와 재원을 대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프로젝트는 우리 그룹의 손에서 벗어나서 전세계의 이목을 받는 미래성장동력이 될 것입니다.“



“제의 수준은 어느정돕니까?”



“인건비와 물건비로 따지면 2조원 정도고 장소까지 치면 3조원 규몹니다.”



장중의 사람들 입이 떡 벌어진 채 다물줄을 몰랐다. 황회장이 초기 개발 착수를 위해 선수금조로 10억을 투자하는데도 많은 반대 의견을 내 놓던 임원들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3조면 십억짜리가 삼천개 있는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들은 인류발전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를 약속했습니다.”



“우리 회사에는 얼마나 이익이 됩니까?”



“개발이 완료되면 생산시설을 우리 그룹내에 둘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이익이 돌아오겠죠. 개발기간 동안만 치더라도 그룹내 인재들이 세계적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경험치를 축적할텐데 그 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엄청난 기횝니다. 적어도 2조의 집행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회사의 운영자금에는 도움이 안되겠지만 회사를 통해 구매행위만 집행한다고 치더라도 매출신장과 재무적 기반이 탄탄해 질 것입니다.”



“그럼 주식이 엄청 오르겠군요.”



“올 해는 영향 받지 않도록 기밀을 유지해야 합니다. 적어도 매입과 매출을 통한 정상적인 거래행위가 회계상에 반영될 내년 이후에는 여러분이 감추고 싶어도 감출 수 없는 엄청난 거래 규모를 통해 주식은 천정을 뚫고 하늘 높이 치솟을 것입니다.”



임원들은 주식가치가 끝없이 상승할 것이라는 말에 도취되어 산만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이봐요, 돈이 그렇게 좋나요?” 황회장이 분위기를 압박하기 위해 고함을 쳤다.



“함요, 회사도 잘되고 주식도 오른다는데 기분이 째지죠.”



“그러면 여러분이 앞으로 어떻게 이박사님을 대해야 하는지 알겠죠?”



“아이쿠, 보물인줄 몰랐습니다. 쌩돈 십억 날리는 줄 알고 열나게 방해했던 놈인데...”



“이젠 어느 정도까지 철저한 보안이 유지 되야 합니다.



이런 일들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룹의 지분을 싹쓸이 하려는 기업사냥꾼들 때문에 임원 여러분의 몫이 그만큼 줄어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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