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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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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 순애에게 가정부가 전화가 왔었음을 알려주었다.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각에 웬일인가 싶어 머리 물기를 닦다 말고 순애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무슨 일로 전화했느냐고 묻자, 밑도 끝도 없이 회사 집무실로 나오라는 것이다.
"무슨 일인데요?"
"마침 항도 갈 일이 있는데 함께 가자고.."
"회사 일일 텐데 제가 왜 가요?"
"답답하긴, 가는 김에 겸사겸사 병원에 들러보려고 그래."
"바쁘실 텐데 굳이 그럴 필요 없어요. 마음 쓰지 마세요"
"말이 많구만... 기다릴 테니 늦지 않도록 서둘러."
민무일의 생각이 이런 식으로 굳어졌다면 순애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늘 그래 왔기 때문에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수긍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친정어머니의 문병을 자청하는 남편의 그 뜻은 고맙고 남편 말에 고사할 명분도 없지만, 항도에 간다는 일은 결코 마음이 가벼울 수 없는 순애다.
혹시 우연히 부딪칠지도 모르는 그 사람과의 해후, 생각만 해도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고사할 명분이 없는 순애는 성격이 다소 급한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외출 나갈 채비를 서둘렀다.
아래층 거실로 내려오자 마침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던 미진이 순애의 옷차림을 훑어 내리며 뜨악한 표정을 짓는다.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미진의 그 표정. 순애는 현관문을 나서며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진땀까지 밴 것을 느끼자 갑자기 속이 상한다.
생각하기조차 싫은 기억들.
내년이면 회갑연을 맞이하는 남편과는 무슨 띠동갑 12살 차이도 아니고, 무려 서른 살이나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언제부터인가 위층과 아래층을 나누어 생활공간을 함께 하는 신미진.
민성기 전무와 별거 상태인 그녀는 명색이 신무일의 둘째 딸이지만, 엄연히 자기 새어머니 격인 순애와는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다.
아버지란 사람이 새장가라고 들은 게 자기보다도 나이가 어린 여자를 떡하니 안방에다 데려다 앉혔으니 미진의 입장에서 오죽하겠냐.
내색은 하지 않지만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현실.
순애는 자신의 하루하루가 늘 이런 식으로 이어지다가 끝을 맺는다면 삶이 얼마나 허무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사람답게 사느냐가 아닐까.
정원을 가로지르는 순애의 머릿속에는 그동안 가치 있는 것으로 믿어왔던 모든 것들에 대해 회의가 밀려들고 있었다.
경제적인 풍요, 정원이 잘 꾸며진 저택, 아늑한 침실, 우아한 외출, 그리고.
그러나 아직도 그것들에 익숙지 않은 순애는 사상누각을 짓고 있음을 실감한다.
누군가 한 발자국만 내디디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그 모래성.
집무실에 당도하자 여비서가 상냥한 얼굴로 맞으며 곧장 안내를 했다.
남편은 흘끔 바라보며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킨다.
순애는 낯선 공간에 혼자가 된 기분으로 결재 서류철을 뒤적이는 한 남자를 바라본다.
머리칼을 단정하게 빗어 넘긴 희멀끔한 이마,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 아래로 열기가 있는 눈매, 끄트머리가 휜 매 부리형 콧마루, 탐욕적인 두툼한 입술, 면도 자국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각진 턱.
이제는 이런 모습이 익숙해야 하는데도 왠지 자신의 몫이 아닌 것처럼 낯선 남자.
내가 왜 이러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 또한 이유가 뚜렷지 않았다.
남편이 서류들을 책상 서랍에 넣고 키를 돌린다.
금속성의 명쾌한 소리가 순애의 여린 가슴을 서늘하게 식혔다.
그가 인터폰을 눌러 차를 대기시키도록 비서에게 지시하고는 상의를 걸친다.
그때까지도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남편.
순애는 여전히 낯선 손님처럼 앉아서 창밖으로 보이는 건물들을 바라봤다.
그 빌딩 안에도 남편 같은 남자와 손님처럼 앉아 있는 그의 아내가 있을까? 그녀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익숙지 않을까를 멀끔히 생각하는 순애.
"무슨 생각 하고 있어? 나가자는데."
"...네?"
"이 여자가 집에서 꿀 퍼먹다 왔어? 갑자기 왜 이래?"
".......?!"
그제야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난 순애는 무일의 뒤를 따라붙었다.
그는 승용차에 오르면서 시간에 늦지 않도록 기사에게 일렀고, 차는 이내 공단지역을 벗어나 시원하게 뚫린 고속도로 위를 달려 나갔다.
창밖은 온통 푸른색 일색으로 스쳐 지나간다.
무거운 머리를 털어버리듯 순애는 창밖 풍경에 매료되어 눈길을 던졌다.
"미진이랑 좀 살갑게 잘 지낼 수 없어? 하루 이틀도 아니고."
".............."
"내 말 듣고 있어?"
"저를 마땅찮게 생각하는 건 오히려 미진이에요."
"설사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먼저 다가가야 하는 거 아냐? 명색이 어른인데."
"몰라요. 누군 뭐 어른이 아니고 아이인가요?"
"으음. 그건 그렇다 치고, 벌써 몇 년인데 아무 소식이 없어?"
"소식이 없다뇨? 무슨."
"몰라서 물어? 아이 말이야."
"나 참, 어이가 없어서. 그런 말을 제게 할 수 있어요? 내일모레면 환갑인 사람이 새삼스럽게 아니라뇨? 은비가 있잖아요. 그리고 시집간 딸이 둘씩이나 있는데."
"거기에 내 나이를 왜 들먹여. 은비가 아들이야? 난 아들이 필요하다고..내가 죽고 나면 제사 지내줄 사내자식 말이야."
"정말 기가 막혀 할 말이 없네요.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언제 우리가."
"혹시, 아직도 그 녀석을 못 잊어서 나한테 정이 없는 거 아냐?"
".............?"
"왜 대답이 없어?"
"이제 제발,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 좀 말아요. 정말 유치해요."
"뭐? 유치하다고?"
"나잇살이나 잡수신 분이 대체 이게 뭐예요. 차 안에서 언쟁이나 하자고 동행시켰어요? 할 수만 있다면 당장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요."
순애는 꾸역꾸역 치솟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슬그머니 등을 돌려 앉았다.
이내 무일의 한숨 소리가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차창 밖의 풍경들 속으로 한 조각 먹구름 같은 기억이 순애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아니, 되돌릴 수만 있다면 송두리째 그 시간을 지워버리고 싶은 망각 속의 조각들.
문현구의 원고는 내가 제공한 소재를 바탕으로 소설 형식으로 전개되고, 그 내용을 작가와 관찰자 시점으로 병행시키는 이중 구조의 특이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삶의 머나먼 여정을 걸어가는 가운데 겪게 되는 고뇌와 갈등을 밀도 있게 서술하여 비극(?)적인 결론을 맞이하게 되는 줄거리다.
세 권 정도 분량의 이 소설이 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내가 판단할 때 예측할 수가 없다.
큰 집에서 나온 뒤, 은혜 이모와의 그 약속을 깨뜨리고 다시금 공철주 형님 밑에서 일을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선택했던 게 출판일이었다.
음으로 양으로 나를 도와주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결과가 좋아야 할 텐데, 승산을 걸고 일에 매달리지만, 만약 실패한다면.
그러나 나는 그 정도는 각오하고 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아지는 인생이 아니기 때문에 복불복의 심정으로 주사위를 던졌고, 주사위는 이미 내 손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나는 퇴근 시간이 지나서도 혼자 한참 동안 사무실에 눌러 앉아있었다.
순애와 경험했던 갖가지 장면들이 내 머릿속을 들락거린다.
때로는 애틋한 그리움이 가슴을 적시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너무나 야속한 마음에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지만, 결국은 분노가 불기둥처럼 솟으면서 양쪽 관자놀이를 압박해왔다.
어떻게 하면 순애의 현재 처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을까, 하고 궁리에 또 궁리했으나 현실적으로 별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다.
자미정의 은혜 이모는 혹시 순애의 행방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두 번이나 찾아가서 매달렸지만, 이모 역시 순애의 행방은 전혀 모르는 눈치였고, 3년 가까이 순애와 생활하면서도 한 번도 친구나 동창생이라고 찾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그 당시 나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었다.
그러므로 얼핏, 여학교 다닐 때 가까웠다던 친구가 한 명 있다는 것 정도로 알뿐이지 그 친구의 이름도 행적도 모르기는 내가 현재 순애의 처지를 모르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문득 윤모라의 귀여운 얼굴이 떠올랐으나 성냥불이 손끝에 닿은 것처럼 황망히 발끝으로 눌러 버렸다.
지금은 결혼해서 아이 낳고 잘살고 있을 텐데.
내가 순애와의 애달픈 사랑에 빠져 오늘처럼 사무실에 죽치고 앉아 줄담배를 피워대면 모라는 대들 듯이 묻곤 했다.
"오빠. 정말. 그 촌년을 그토록 사랑해?"
여자는 질투 빼면 두 근도 안 된다는 옛말이 있다.
그리고 해바라기 윤모라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순간 모라가 얼마나 멍청하게 보였던지.
"계집애야! 그걸 말이냐고 하냐? 몰라서 물어?"
두 눈을 독수리처럼 부라리며 내가 나무라면 그녀는 입꼬리를 야릇하게 끌어올리며 비아냥거린다.
"누군지 얼굴은 모르지만, 그 촌년 정말 좋겠다..치잇!"
"비웃는 것처럼 들리네?"
"치..그렇쟎아. 바로 옆에 있는 년은 줄 거 안 줄 거 다 줬는데도 찬밥 신세고, 짝사랑에 넋이 빠진 오빠 같은 열남도 있다니, 요즘 같은 세상에 너무 신기해."
"그 입 안 닥쳐? 짝사랑이라니. 하긴 네가 어떻게 내 마음을 알겠냐. 관두자."
"안 봐도 비디오지 뭐. 자갈마당이나 요정이나 그게 그거 아냐? 어차피 기생질할 여자한테 오매불망 목을 매다니."
다른 사람이 만약에 그런 말을 했다면 주먹질부터 튀어 나갔을 거다.
"나. 약발 먹인다고 내가 너랑 살림 차릴 것도 아니고, 일찌감치 냉수 마시고 속 차려. 계집애야."
"아. 정말 질투나. 언제 한 번 만나기만 해봐. 확! 그냥."
그 순간 나는 또 한 번 눈을 부라리며 모라의 두 눈을 후벼팔 듯이 노려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공격적인 표현보다는 어떤 특별한 감정이 내 마음속에서 발동했던 것 같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의 그 특별한 감정이란 결국 모라와의 관계 정리였다.
윤모라는 물론 설향 누나의 몸까지 탐하면서 순애에게 지고지순한 사랑을 운운한다는 건 어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순애가 은혜 이모 방에서 잠 들어있는 그 모습을 처음 본 후, 계절이 세 번 바뀔 동안 풀 방구리 쥐 드나들 듯 내가 자미정을 들락거렸으니.
나는 이미 순애에게 깊이 빠져있었고, 우리 두 사람의 사랑은 그 결실의 열매를 보기 위해 어느 정도 영글어 가고 있을 무렵, 내가 그때 모라에게 느꼈던 그 특별한 감정을 실행에 옮기는 일이 있었다.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해바라기 윤모라에게 남자를 소개해 준 획기적인 사건.
양심에 일말의 가책은 느꼈지만 내 무식한 짱돌 생각에는 그 방법밖에 없는 것 같았다.
모라보다 두 살 많은 녀석은 솔직히 집안 배경은 별로 볼 게 없지만 나름대로 비전도 있고 제법 잘생긴 대학생 놈이었다.
자갈마당으로 도로 돌아가던지, 부산 앞바다에 빠져 죽는다고 그 난리를 치는 모라를 한 달가량이나 걸려 겨우겨우 달랬다.
나 참, 제가 사랑하는 남자 손에 이끌려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는 모라 심정이 어떠했을까.
지금도 그 당시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모라에게 칼침 안 맞은 게 다행이니까.
윤모라와 나는 무덤까지 안고 갈 비밀 하나를 가슴속 깊숙이 묻어둔 채, 태연을 가장하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은 입이 귀에 걸려 헤벌쭉 정신을 놓았지만 내 마음은 죄책감까지는 아니어도 좀 그랬다.
하긴, 윤모라는 누가 봐도 귀염성 있는 얼굴에 어디다 내어놓아도 빠지고 모가 날 그런 여자는 아니었으니까.
말없이 고개만 푹 숙이고 있는 모라와 마냥 웃음만 잔뜩 베어 무는 녀석.
나는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소개 인사만 시켜주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소개팅 자리에서 벗어난 나는 머리라도 식히려고 그냥 무작정 걸었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낯익은 풍경, 익숙한 한옥 건물이 바로 눈앞에 보였다.
중심가에서 자미정까지는 걸어서 30 여분의 거리.
무작정 걷는 내내 복잡한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순애를 취하느냐. 그리고 자미정에서 데리고 나와 살림을 차리느냐. 그런 단순한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자미정으로 발길이 향했다.
은혜 이모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 가당찮은 설레발이고 뻐꾸기다.
아무리 수양녀이지만 명색이 사촌지간인데 어떻게 그런 여동생과 연애질하고, 함께 데리고 나가서 살림을 차릴 생각을 하느냐고, 애초부터 은혜 이모가 나를 대하는 태도는 한겨울 처마 밑에 꽁꽁 얼어붙은 고드름 그 자체였다.
하긴 뭐, 내가 자미정에 매번 올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이모는 정말 자기 수양딸인 것처럼 시간이 날 때마다 순애에게 난을 치게 하고, 다도는 물론 여자에게 필요한 기본 소양들을 손수 가르치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설향 누나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음해 공작, 늘 쌀쌀맞게 나를 대하는 이화 누님,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순애와의 사랑이 더욱 야무지고 알차게 그 열매를 맺어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말로만 오빠 동생이지 아무리 따져보아도 근친은 절대 아니잖은가? 순애와 나 사이에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우리는 은혜 이모 몰래 꽤 깊은 관계로 발전했고, 아. 물론 아직 몸을 섞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면 얼어붙었던 얼음은 분명 녹을 테니까 나는 그 시기를 기다리는 셈 치고 마음만 다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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